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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임소사
林召史
< ? ~ ? > -이지웅의 처
조선 후기의 열녀다. 아산현에 살았던 이지웅의 처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초
에 청나라 군대의 핍박(逼迫)을 당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인조 때에 정려를 세웠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59] 임태춘
任泰春
< ? ~ ? >
조선 후기 영조 때의 효자·은일(隱逸)이며 아산 염
치 쌍죽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절의
징하(徵夏)의 증손자이자 시구(時九)의 손자이며 증
사복시정 신백(信白)의 아들이다. 자는 자인(子仁), 호
는 농옹(聾翁)이다. 귀머거리 늙은이라는 뜻의 호(號)
에서 보여주듯 그는 증조부 서재(西齋) 징하가 신임사
화(신임옥사)를 겪은 이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
과 거리를 두고 은거했던 것처럼 자신도 벼슬에 뜻을
접고 학문과 효행을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다. 공자가
말한 효행의 다섯 가지를 모두 갖추고 지극하게 부모
<임태춘 효자 정려>
를 섬겼다. 부모 병환 중에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
려 위급을 면했고 돌아가신 뒤에는 예에 따라 3년 상
을 모셨다. 그의 이런 효행이 후에 조두순(趙斗淳, 1796~1870)에 의해 왕에게 알려져 1843년(헌종 9) 정
려가 내려졌고 1875년(고종 12)에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그의 손자인 전재 헌회(憲晦)의 제자 간재 전
우(田愚)가 지은 정려기, 1985년 후손 용순(龍淳)이 지은 중건기(重建記)와 함께 정려각이 있고 염치읍 쌍
죽리 마을 뒷산에 효자비가 있다.
[60] 임희철
任熙喆
<1857(철종 8년) ~ 1934>
근대의 효자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전라좌수사를 지내고 분
무원종공신에 책록된 욱( )의 6세손이고 호덕(浩德)의 손자이며
보근(輔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주 강(姜)씨이며 아산현 선교
촌(船橋村-배다리, 지금의 영인면 월선리)에서 출생했고 자는 원
집(元集)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
서부터 지극 정성으로 할머니께 효도했으며 할머니가 노환으로 병
<임희철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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