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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되어 백의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에 중도 부처되었다. 1595년(선조
박하고 정직하여 이해득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치정에는 심신을 다하였다. 보령의
28) 풀려나 영돈령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될 때 이이첨, 정인
화암서원과 서천의 건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홍, 홍여순 등과 대북파가 되어 그 영수로서 활약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자는 병보(屛甫), 호는 존양재(存養齋), 시호는 문열(文
烈)인데, 목은 이색의 3남 이종선(李種善)의 3남이다. 1427년(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
리었으며, 특히 문장에 능하여 선조조 문장 8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다. 서화에도 능하
여 대자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 묘비와 안강의 이언적 묘비를
에 급제 집현전 학사가 되고, 1435년(세종 17) 집현전 부교리로 승전, 『통감훈의(通鑑訓
義)』가 완성되자 세종은 경회루에서 그를 비롯한 찬집관(撰集官) 등을 불러 노고를 위로하
썼고, 이이, 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는 『아계집(鵝溪集)』
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예산 대술면 방산리에 묘소와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였다. 1438년 아버지 이종선이 죽자 벼슬을 버리고 3년 시묘를 하였다. 1441년(세종 23) 다
이산보(李山甫: 1539~1594)의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이지무(李之茂)의 아
시 복관되고 1442년(세종 24) 직집현전에 승진, 1445년(세종 27)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
들로 숙부인 이지함을 사사(師事)하였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를 거쳐 1568년(선조 1)
하였다. 사창(社倉) 제도에 대한 사목(事目)을 올리고 소금 전매에 대한 폐단을 건의하였다.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의 추천으로 춘추관에 들어갔다가 전적, 해미현감, 정언
집현전 직제학 김문(金汶)과 더불어 의염법(義鹽法)을 건의하고,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을 지냈으며, 왕명을 받고 순안어사로 북도를 순찰하고 돌아와 수찬, 교리, 지평, 헌납, 이
을 지어 올리고 전문(箋文)을 지었다. 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전문(箋文)을 쓰고,
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446년(세종 23) 축성공법(築城貢法) 입거(入居)에 관한 폐단을 논하였다. 1450년(문종 원
1577년(선조 10) 양모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서천에 돌아갔다가 다시 사의, 집
년) 고려 말 충신 길재의 시호를 내려줄 것을 상소하였고, 1452년(문종 2) 『세종실록』 편찬
의, 사간, 응교,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당론을 끝까지 진술하다가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종
에 참여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병조참판이 되고 11월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병조판
부시정에 좌천되었다. 1년 뒤 다시 집의로 전임하였고, 이어 동부승지, 대사간, 우승지를 지
서에 임명, 집현전 대제학, 성균관대사성등을 역임하고 한성군(韓城君)으로 봉습(封襲)되
냈다. 1585년(선조 18) 부제학 김우옹, 이이, 정철이 행한 일을 논박하는 것을 반박하자, 선
었다. 이에 정난공신호(靖難功臣號)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조는 그의 충절을 크게 칭찬하여 대사헌으로 특진시켰다. 뒤에 이이, 박순, 정철의 공적을
1455년(세조 원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직하고, 1459년(세조 5) 사육신 조카 이개(李
塏)가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자 사간원의 탄핵을 받게 되었으나 세조는 연좌시키지 말 것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경상도와 황해도의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의 자리에서 난국을 수습하고 성절사로
을 명하였다. 1459년(세조 5)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명나라에 다녀왔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이흡(李洽: 1549~1608)의 자는 화보(和甫), 호는 취암(醉菴), 본관은 한산이다. 목은 이
건저 문제로 정철 등 서인이 화를 당하자, 이에 연루 곧 파직되어 고향인 보령에 내려가 독
색의 9대손으로 한양군(韓陽君) 이흥준의 아들이며 재종조 북애공 이증의 문인이다. 1573
서로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고, 대사간, 이조참판, 이
년(선조 6) 생원이 되고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 승문원에 등용되어 그 후 정언, 헌
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요양에 머물면서 진군하지 않자 그는 명나라 장수
납, 장령 등 요직을 거쳤다. 1589년(선조 22) 10월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그는 사간원의 헌
를 설득하여 진군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북도와 삼남 지방
납이었는데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상소를 올려 소신을 피력하
의 도검찰사로 나갔는데, 지난날의 선정에 감복하여 도민들이 적극 협력하여 무사히 해결
였다. 그 후 1591년(선조 24) 봄 장령에 임명되었을 때 아무도 하기를 꺼려하는 정인홍에 대
하였다. 1594년(선조 27) 대기근이 들자 동궁의 명을 받고 밤낮으로 구휼에 힘쓰다가 병을
한 탄핵 상소를 올려 조야가 모두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이후 약 20년간 파면, 파직, 사직,
얻어 그해 4월 23일 홍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보령군 주표면 고정리에 있다. 1604
삭직, 삭탈관직 등 영의정 송강 정철과 함께 유배로 이어지는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특
년 호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성품이 소
히 정인홍이 죄를 항론한 것이 끝내 그의 무리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1601년(선조 34) 좌참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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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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