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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강옹(江翁)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서 아침마다 늘 부모에게 문안을 올렸다. 특히 부모의 병환 중에
는 약을 직접 달여서 올리는 것은 물론, 한겨울에도 찬물로 목욕재계한 뒤 자기가 아프고 부모님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3년 상의 시묘를 하면서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이러한
그의 효행이 알려져 이미 1828년(순조 28)에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그는 효행으로 1876년(고종 13)에 통
훈대부 사헌부 감찰로 추증되었고 또한 1891년(고종 28)에 학행(學行)으로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가증되
었다. 정려는 지금까지 염치읍 강청리 보존되어 있으며 묘도 강청리 종산에 있다.
<이태연 효자 정려>
<이태연의 묘비>
[57] 이홍무
李弘茂
< ? ~ 1728(영조4년)>
조선 후기의 충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다. 순신(舜臣)의 현손이고 덕은군(德恩君) 광윤(光胤)의 아들이
며 자는 자장(子長)이다. 1728년(영조4)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마침 충청병사(兵使)로 부임한 조카 봉상(鳳
祥)의 병영이 있는 청주에 가 있다가 난을 당했다. 청주성
이 함락되고 봉상은 붙잡혀 먼저 죽음을 당했으며 그에게
병부(兵符)의 소재를 물으며 핍박하는 역도에게 끝까지 굽
히지 않고 6일 간 저항하다가 순절했다. 이조판서에 추증
되고 1756년(영조 32)에 충신 정려가 내려졌으며 1871년
(고종 8)에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충사 정려
에 함께 배향되어 있으며 묘는 음봉면 산정리에 있다. 우의
정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묘갈문을 지었다.
<이홍무 정려현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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