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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독려했지만임득의장군이가장먼저난진압을위해달려왔던것으로
보인다.이는이몽학의난을기록한국조보감,실록등대다수에서홍가신
다음으로임득의장군이가장먼저등장하고있으며,같은홍주출신인박
명현또한임득의의추천으로후에합류했기때문이다.
소식을듣고임득의는홍주성으로달려갔다.그런데혼자가아닌임씨가
문의형제들과가솔들까지남자란남자는모두참여했다.그렇다면홍가신
의연락을받은임득의장군은가족들을모아놓고난진압을위해가문이
어떤도움을줄수있을지상의했을것이라추정할수있다.구체적기록이
있지않더라도목숨을잃을수도있는전투에함께하자면서나누었을결연
하고도의연히오갔을대화들을짐작할수있다.1605년(선조38)청난원종
공신에임득의형제들이포함되었는데당시전지에는“그대신료들은대소
를막론하고혹은성을죽음으로고수하기도하고혹은용감하게험난한일
을맡아삶을잊어버리기도하였으므로..”라고쓰여있어목숨을건그들의
결연한각오들을대신말해주는듯하다.그런데형제뿐이아니었다.집안에
전하는이야기로는임득의장군은민병800여명까지끌어모아홍주성으로
향했다고한다.
임득의를필두로평택임씨인물들과민병들은포위된홍주성을뚫고나
아갔다.이몽학의난은충청도지역에서발생해한때도성이있는한양까지
도위협할뻔했던기세를가졌던성난민중의움직임이었다.대규모반란
을진압하는데는어떤위험에빠질지모르며,잘못하여8형제가모두목숨
도잃게된다면가문의대가끊길수도있는일이다.당시임득의장군은홍
주에거주하고있던무관일뿐이었다.당시홍가신은홍주목사였고,이곳에
부임한지갓2년이된관리였다.즉,홍가신은무관이아닌문관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칼을잡고싸움에나서지않고전략과총괄지휘를도맡았다.
성안에서수호하는일은어쩌면목민관으로서본분을지키는일이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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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임득의장군’문화콘텐츠개발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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