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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_6
자암의시첩에쓰다(윤근수)
자암공 김구는 자가 대유인데, 이 시첩은 공의 시를 손으로 직접 쓴 것이
다. 공은 기묘년 때의 바른 사람으로 지난 날 정암 조광조와 같은 한 때의 제현들
이 명성을 떨쳤을 때 한결같이 도학에 뜻을 두어 다른 재예에는 마음을 두지 않
았다. 충암 김정 이하 분들만 곁으로 문장을 지었을뿐이었다. 제현의 논의가 문
장은 한(韓)나라를 모범으로, 시라면 당(唐)나라를 모범으로, 진초(眞草)라면 진
(晉)나라를 모범으로, 인물이라면 송(宋)나라를 모범으로 삼아 평생 힘쓰는 근거
로삼았으니,또한풍성하다고하겠다.
지금 이 시첩을 살펴보니 그렇다고 믿을 만하지 않은가! 제현들이 바야흐로
군주를 얻어 도를 시행할 때 힘써 삼대(三代)의 훌륭한 다스림을 당기고자 했는
데, 간사한 인간들이 이간질을 하여 북문에서 재앙이 일어나 사방으로 유배를
떠나 심한 분은 목숨마저 보존하지 못했다. 공은 부학(副學)으로서 멀리 바닷
가 까지 유배를 갔는데 계사년(1533년)에 사면을 받아 예산 구거(舊居)로 돌아
왔다가 결국 이듬해 갑오년(1534년)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겨우 마흔 일곱 살
이었다. 나중에 원래 직책을 회복했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 종계(宗系)의 일에
참여하여 광국원종공 1등에 책록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니, 이것이 공의 애석
한일과영광된일의대강이다.
덕을 심은 사람은 보답을 받는데 공의 자부(子婦) 이씨와 공의 손자 김갑(金
?)이 모두 피해를 입었고, 공의손자 김온(金?)은 도종사관으로 머물러 있다
가 어머니의 어린 동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 놀라고 근심된 끝에 병을 얻어 연
이어 세상을 떠났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을 내린다는 것도 틀린 것인
가? 또 들으니 공의 재주는 약관의 나이로 생원진사시에 응시했는데, 고관이
공의 글을 읽고는 거듭 찬탄해 양 시험에서 제1명으로 급제했고, 얼마뒤 계유
146)
147)
년(1513년)에 방안
으로 석갈
사필(史筆)을 잡기도 했고 옥당에 올라 정자
146)방안:과거시험의전시때갑과에둘째로급제한사람을일컫는말.
147)석갈:평민이처음관직을맡은것을비유한다.
102│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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