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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철종 10)에 효열(孝烈)로서 정려를 명하여 인주면 도흥2리 섬말에 정문(旌門)이 지금까지 전해지
고 있으며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가 포장(褒狀)을 지었다.
<열녀 전주 이씨 정려(오른쪽)>
<전주 이씨 열녀 정려 현판>
[53] 이완
李莞
<1579(선조 12년) ~ 1627(인조 5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다. 덕수 이씨 아산 입향조 정(貞)의 손자이고 충무공 이순신의
맏형인 증 참판(贈參判) 희신(羲臣)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주 강(姜)씨 세온(世溫)의 딸이다. 자는 열보
(悅甫)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약관의 나이로 숙부(叔父)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면서 여러 해전
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전사했으나 끝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대신 독전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둘 수 있게 했다.
1599년(선조 32)에 무과에 급제했고 남포현감 등을 거쳐 1618년(광해군 10) 평양중군에 임명되었다.
1623년(인조 즉위년)에 충청도병마절도사(종2품)에 올랐으며 이듬해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가 되었다. 명과 후금 간에 다툼이 한창이던 시기에 의주부윤(義
州府尹)으로 있을 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과 갈등이 심하였다. 그 시기에 1627년(인조 5) 마침내 후금(後
金, 뒤에 청)이 쳐들어와 정묘호란이 시작되었다. 그는 의주를 포위한 적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
으로 결국 패하게 되자 무기가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병기고에 불을 지르고 사촌동생 신(藎)과 함께 장
렬하게 분사(焚死)했다.
<현충사에 세워진 이완의 정려각>
<이완의 정려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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