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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로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올린 계유상
라에 보답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저서로 『면암
소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집(勉庵集)』이 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는 논산군 노성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많은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자 그 시
면에 있었으나, 일제의 강요로 1910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장되었고 춘추대의비가
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장기 집
세워졌다.
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한편 고종의 신임을
이남규(李南珪: 1855~1907)의 자는 원팔(元八), 호는 수당(修堂)이며 본관은 한산(韓
山)이다.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의 12대손이고, 석루 이경전(石樓 李慶全)의 11대손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고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하였으
나, 권신들이 반발하여 도리어 대원군의 하야를 부자간을 이간
이 된다. 이남규는 1855년 11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861년 성재 허전(性齋 許傳 :
하는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상소를 올려 민씨 일족의 잘못을
1797~1886)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 뒤 1875년(고종 12년) 21살 때 감시(監試)에
비난하였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
합격하고 임오군란이 나던 188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다음 해에 승문원부정자, 1885
주도로 유배되었다. 1873년(고종 10)부터 3년간의 유배 생활을
년 홍문관교리에 제수되었으며, 이해 겨울 휴가를 청하여 예산의 어버이를 뵈었다. 1887년
최익현
???출처:문화재청
계기로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을
33살에 서학교수(西學敎授)가 되었다가 3월에 모부인상(母夫人喪)을 당하여 돌아왔다.
걸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려
1889년에 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뒤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공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얼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
마 후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894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무속의 풍습이 널리 퍼
도로 유배되었으나 그의 신념과 지조는 꺾이지 않았다. 1895년
져 민폐가 되었으므로, 그는 그 우두머리를 잡아 가두었고, 거리의 음사(淫祠)를 철폐시켰
(고종 32)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오랫동안
다. 다음 해인 1895년 황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 칙령이 내리자, 그는 “신이 비록
의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
죽을지언정 감히 칙명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단발령이 내리자 “이 머리는 베일지
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여러 해에 걸쳐 관직에 임명되었
언정 머리털은 깎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벼슬을 버리고 떠나오면서 상소를 올
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
려 모후(母后)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킬 것, 원수를 갚고 도적을 칠 것을 아뢰었다. 42세 되
하였다.
는 1896년 안동부 관찰사, 1898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이후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고 궁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그 후 밀칙(密勅)에 의해 함경북도 안렴사의 직을 수행하다 소환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 조약에 참여한
당하였다. 이에 상소를 올려 자신이 보답하지 못한 바를 스스로 탄핵하고는 예산의 고향집
박재순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
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후진 양성에 힘썼고, 물헌 이명익(勿軒 李明翊)과 함께
론 수단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 무력적 항일 의병운동
월과(月課)를 열고 절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마을에 향약을 설치하였다. 1905년 51세에 을
으로 전환되었다. 1906년 윤 4월 전북 태인에서 궐기하고, 한편
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려 여러 역적들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근심과 분노가 마
으로 「창의토적소(倡儀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
침내 병이 되었다. 1906년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이남규
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필도사민(布告八道四民)」의 포고문
는 그를 도와주고 숨겨주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공주감옥에 구금되었다. 1907년 8월 19
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죄를 묻는 「기일본정부(寄日本政
일 보병과 기병을 대동한 왜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를 포박하려 하자 이들에 맞서 설전
수당고택
府)」를 발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나
을 벌이다 왜인의 칼날에 희생되었으니 이때가 향년 53세였다. 이해 9월 예산의 대술면 한
???출처:문화재청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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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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