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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서해조(徐海朝)(1689~1770)
본관은연산(連山)이며,자는종지(宗之)이고호는구구재(九九齋)이다.숙종17년연산서
욱(昱)의아들로광시면구례리에서태어났다.
1714년(숙종40년)생원이되고,1732년(영조8년)성균관의반제(泮製)에서장원하여전
시에 직부(直赴)하라는 특전을 받았으나 이복령(李復齡)과 시권(試券)이 바뀌었음을 자백
하여취소되었다.이해이일을임금이아름답게여겨후릉참봉(厚陵參奉)에제수하였으며,
이듬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옮겼다. 1735년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급제하였다.
1737년 자여찰방(自如察訪)으로 나갔다가 목릉별검(穆陵別檢)을 거쳐 1742년 성균관 전
적으로 승진하였다. 1745년 예조·병조좌랑과 병조정랑을 거쳐, 연풍현감으로 나가 빈번한
사행(使行)으로인한민폐를덜어주었다.
1751년에지평으로직무가번거로운내직을피해외직을원하던조재호(趙載浩)를탄핵하
였다.곧이어이조정랑으로옮겼으며,1753년에는황해도의향시(鄕試)를,1755년에는전라
도의 향시를 주관하였다. 1763년 병조참의에 오르고, 1770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졸
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30여년의 관직생활 동안 한번도 권세있는 사람에게 아첨한
적이없었다.두보(杜甫)의시를좋아하였고,춘추좌씨전의문장을좋아하였다.
저서로는두시보주(杜詩補注)·좌사초류(左史抄類)가있고,특히제례에밝았다.
항상청렴결백하고사재로어려운관비를 보충하였으며조선중엽의사색당쟁(四色?爭)
이심할때에도오직중도를지켜적이없는정치가였으며청빈하여칠십에향리로낙향할
때에는전토는물론기거할집조차없어타인의집에서섭포살이하면서도후학에전념하였
으며두시(杜詩)에주를내었다하나전하지않고그후손들이대흥,광시에세거(世居)하여
구례리에묘소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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