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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이봉상
李鳳祥
<1676(숙종 2년)~1728(영조 4년)>
조선 후기의 무신·충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충무공 순신(舜臣)의 5세손이며 임실현감 회( )의
현손이고 순릉참봉 지백(之白)의 증손이다. 현릉참봉 광윤(光胤)의 손자이며 상주영장 홍저(弘著)의 아들
이다. 아산 염치 백암리에서 출생했고 자는 의숙(儀叔)이다.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하였고 1706년
(숙종 32)에 삭주부사(朔州府使), 1711년(숙종 37) 승지 등을 거쳤다. 경종(1720~1724) 연간에 포도대
장·훈련원도정·삼도수군통제사·총융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다. 1725년(영조 1)에 형조참판으로
훈련금위대장을 겸했는데 이때 소론인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등의 죄상을 논박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미움을 받아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 뒤 어영대장에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어 청주
병영으로 갔다.
이듬해(1728년)에 이인좌(李麟佐) 일파가 안성 양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성을 급습해 왔을 때 내
통한 자의 소행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숙부인 홍무(弘茂)와 함께 붙잡혔고 이인좌가
항복과 합류를 권했지만 충무공 집안으로서 충의를 내세워 굽히지 않고 끝내 모두 순절했다. 뒤에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에 다녀와서 그의 충절을 보고하니 영조는 좌찬성(左贊成-종1품)을 추증하고 시호
를 충민(忠愍)이라 했다. 1728년(영조 4) 충신 정려가 내려졌고 1831년(영조 7) 청주에 표충사를 세워 배
향하도록 하였다.
아산의 유학(幼學) 변세구(卞世矩) 등의 상소로 현충사에 추가로 배향하고 부조묘(不 廟)를 명했다. 묘
는 음봉면 삼거리 충무공의 묘소 서쪽의 문중 묘역에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도암 이재(李縡)가
비문을 짓고 대사헌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전(篆)하였고 1746년(영조
22)에 세워졌다. 1848년(헌종 14)에 왕이 그의 충절의 기려 관원을 보내 제향하기도 했다.
<이봉상의 신도비와 묘>
이순신
- 명인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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