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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윤취은
尹就殷
< 1518(중종 13년) ~ 1593(선조 26년) >
조선 중기의 효자로 본관은 신녕(新寧)이다. 집의 자임(自任)의 증손, 세형(世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여흥(驪興) 김(金)씨다. 자는 빙경(聘卿)이며 부인은 경주 이(李)씨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
를 섬겼다. 부친의 나이 팔십 세가 지나서 눈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니 그는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았고 몹시 더운 때에는 길가의 소나무 그늘로 모시고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선조 때에 암행어사 유근
(柳根)이 아산 땅에 왔다가 마침 그가 훌륭한 음식으로 부친을 봉양하는 것을 발견하고 깊이 탄복하여 조
정에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해서 광릉참봉을 제수했으나 사양했다. 이어 창릉·집경전·건원릉참봉 등을
제수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아산현감 토정 이지함(李之 )도 역시 그의 효성을 칭찬했다.
[46] 이면
<1577(선조 10년) ~ 1597(선조 30년)>
조선 중기의 충절 지사(志士)로 충무공 이순신의 셋
째 아들이다. 초명은 염(苒)이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잘 해서 충무공이 극
진히 사랑했다. 그는 왜란(정유재란) 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아산에 있었다. 왜적들이 명랑해전에서 패전
한 분풀이를 하려고 공의 고향인 이곳으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있을 때 뛰어나가 왜적을 무찌르다 장
렬히 전사했다. 그때 나이 21세였다. 약 200년 뒤인
1796년(정조 20) 8월에, 비록 미혼이고 관직이 없는
학생(學生)이었지만 그 충절을 기려 이조 참의(吏曹參
<이면의 묘>
議-정3품)를 증직했다. 묘는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
경내에 있다.
[47] 이문우
李文宇
< ? ~ ? >
조선 후기의 문신·효자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대사헌 송교(松郊) 목( , 1572~1646)의 후손이다.
자는 공칠(公七)이고 호는 화암(華庵)이다. 경서에 밝고 행실을 바르게 닦아 몸가짐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다. 공주에 가서 벼슬하느라 효도를 다하지 못하자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효
자의 애절한 심정을 읊은《시경》
‘요아(蓼莪)편’
을 날마다 암송했다. 그의 병이 심해졌지만 오히려
‘호천망
극(昊天罔極)’
의 구절을 암송하여 목이 메었다. 묘는 아산시 염치읍 중방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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