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페이지

8페이지 본문시작

서산의 문화인물
정 충 신
충무공
정충신은 자는 가행(可 ), 호는 만운(晩雲)으로. 금천군
(錦川君) 윤(綸)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전라도 광주
에서 태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충신은 원래 광주의
아전이었다고 하고, 야담에는 정충신의 아버지가 광주 향청의
좌수였다고 한다.
정충신은 임진왜란때에 광주목사로 있던 권율의 통인
노릇을 하였는데, 권목사의 총애를 받아 17세의 어린 나이로
왜군들 사이를 뚫고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하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이항복의 추천으로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게 된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 정충신을 권주위에 보내어 호국(胡國)의 정세를
살피게 하였는데, 호국의 여러 추장들은 그의 당당한
태도와 지략에 감복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조 29년 이항복이 적중의 사정과 정사(正使)가 탈출한
곡절을 조정에 알리기 위해 적중을 왕래한 정충신과 함께 대궐에 왔다는 사실이다. 정충신은 이때
부산의 왜영에서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선조 39년에는 변방의 여진족의 동태파악을 위하여 정충신이 파견되어 그가 작성한 문견록
(聞見 )에 의하여 정책을 논의하였다. 광해군 2년에는 북방 오랑캐 노추의 동정을 살피는데 보을하
첨사(甫乙下僉使) 정충신의 치보가 큰 역할을 하였고, 광해군 11년에 드디어 오랑캐의 사절로 뽑혀
노추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마침 중병에 걸려 무산되었다. 그 후로도 광해군 13년 여진과의 외교관계
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광해군대 북방외교를 이끌었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던 무렵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은
정충신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였다. 이때 그는 삼책(三策)을 말하고, 이괄은 샛길로 경도(京都)를 취하는
하책을 쓸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말이 적중하였다. 안현에 먼저 진을 치고 기다리다 이괄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개가를 이루어냈다. 이때의 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27인중 장만(張晩)·남이흥(南以
2011_07

8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