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페이지

7페이지 본문시작

319
기』
에는 순교 월일을 각각 달리하여“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치명했다”
고 표현된 순교자들이 있는
42)
이 경우에도 그 동반 순교자들의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헌을 통해
밝힐 수 있는 117명의 순교자 이외에도 또 다른 순교자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순교자의 숫자가 무한정으로 늘어날 수는 없는 것이며, 순교자의 숫자를 무한정
늘리려는 시도는 박해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는 큰 차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미지방의 순교자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보다는 다수의 순교자들이 남긴 순교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이곳 해미에서 전개된 순교의 주인공들은 거개가‘불학 무식한 농투성이’
로 지칭되던 사람들이
었다. 종전에 이들은 양반관료나 지주에 얽매여 지내며 자신의 인격 자체가 중세 봉건적 질곡 속에
매몰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후 이들은 양반관료나 나라님으로부터도 강제될 수 없는 자신의
양심의 존재를 터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가해
지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양심과 신앙은
생명보다도 중요했으므로 이들은 이를 위해 생명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순교는 자신의 인격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기도 했으며, 이들은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려던 노력의 과정에서 자신을 산화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 19세기 조선의 순교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의 일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순교에 대해 이외에도 교회사적 의미를 별도로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미지역의 순교자들에 관해서도 그 수적 측면만을 강조하며 더 이상 경탄해서는 아니
되고, 그 질적 의미를 음미해 나가야 한다. 19세기 조선왕조에서 진행된 순교의 주체는 이름 없는
민중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비특권적 민중의 각성은 우리 역사의 위대한 발전을 뜻하는 사실이
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각성을 통해 봉건사회의 어둠이 걷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순교자의 활동무대였던 해미는 하찮은 인민들이 자신의 존귀함을 확인한 장소이며, 새로운 깨달
음의 장소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해미의 사적지가 갖는 올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42)
『치명일기』685, 702.
7
http://seosan.cult21.or.kr

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