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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백년
姜栢年
<1603(선조 36년) ~ 1681(숙종 7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회덕(대전) 출신이며 후에 아산으로 이주했다. 본관은 진주이며 조부는 영의정에
추증된 운상(雲祥)이고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주( )이다.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峰)·한계(閑溪)·
청월헌(聽月軒)이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1646년(인조 24)에
소현세자의 빈(嬪)인 강씨가 무고로 사사된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부교리로서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한 때 삭직되었다. 이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오르고 이듬해 상소
하여 전국의 향교를 부흥하게 하였다. 1648년(인조 26) 대사간으로서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였
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1653년(효종 4) 좌승지에 오르고 충청도·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660년(현
종 1)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1년(효종 2) 충청감사 재직 시에
는 충청감사를 거쳐 당시 영의정이 된 김육(金堉)이 주도한 대동법의 충청도 확대 시행을 원활히 추진하
여 크게 칭송을 받았다. 1670년 도승지·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현종이 죽자 그 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예조판서·우참찬·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부친 죽창공이 80세를 넘자 정성껏 섬기고 뜻을 받드는 일에 충실했다.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여묘살
이를 했는데 이때 지극히 슬퍼했고 곡하는 시간을 빼고는 오직 예서를 읽었다고 한다. 문장과 청백으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90년(숙종 16)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후에 청백리(淸白吏)
로 책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문집에《설봉집(雪峰集)》
《한계만록(閑溪 錄)》등이 있다. 온양(배
방면 중리)의 정퇴서원(靜退書院)과 수안의 용계서원, 청주의 기암서원에 배향되었다.
[2] 강세구
姜世龜
<1632(인조 10년)~1703(숙종29년)>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은열공 민첨(民瞻)의 17세손이고 증 이조참의 학년(鶴年)의
손자이며 강원감사 호(鎬)의 아들이다. 자는 중보(仲寶, 重寶)이고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며 서울에서 살
았다. 1660년(현종 1) 식년(式年) 생원(生員) 3등에 입격했
다. 1676년 강릉참봉, 1678년(숙종 4) 증광(增廣) 문과 을과
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듬해인 1679년
에 홍문록에 오르고 정언이 되었다. 10월 홍문관 교리에 재
직 중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한 뒤 통정대부가 되었고
11월에 승지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충홍도(충청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가 10월에 대사간이 되었다. 1692년(숙
종 18)에 예조참의를 거쳐 이듬해(1693) 6월 대사간에 임명
되었으나 임금의 능행(陵幸-원릉·제릉·후릉에 행차한 일)
을 간하여 파직되었다가 여러 신하들의 간언으로 9월에 다
시 승지로 제수되었다.
<강세구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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