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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 해미가 성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1995년 9월 상홍리에 모셔
져 있던 순교자 유해들은 본래의 자리인 해미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맺음말
박해가 끝난 이후 서산지역에는 선앙골, 황골, 소길리(금학리), 가재(상홍리) 등의 교우촌이
있었다. 이중 소길리, 상홍리 교우촌은 박해시대부터 있던 곳으로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여 후일 공소로 전환되어 서산지역 천주교 확산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서산 본당의 전신은 1908년 수곡(결성 공리)에 설립된 본당이다. 이 본당이 1917년 소길리로
이전함에 따라 서산지역 안에서도 본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교통의 발달과 시대 환경의 변화로
소길리에 있던 본당은 1920년 상홍리로 이전되었고, 천주교가 서산 도심으로도 확산됨에 따라
1937년에 서산 동문동에 최종적으로 서산 본당이 자리를 잡았다. 서산 본당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시련을 겪었으나 이 지역 천주교 확산의 중심이 되었다. 그 결과 서산지역
안에는 현재 6개의 본당이 자리하게 되었다.
서산지역에서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출판?교육활동에 기억할 만한 점들이 있었다. 일찍부터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해 단계별 교리책이 발간되었고, 천주교 지도자들의 단기 교육프로그램인
회장 피정이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1958년에는 운산에 대철중학교가 설립됨으로써
농촌지역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서산지역 천주교의 특징으로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은 이곳이 박해시대의 피난처이면서 동시에
순교지라는 점이다.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름난 해미가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외곽
에는 신자들이 피난하여 정착하기에 용이한 곳들이 분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은 후일 천주
교가 서산지역에 정착되면서 순교자 현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35년 해미의 순교자 유해 발굴
이후 시작된 순교자 현양은 신자들에 의해 지속되었고 이것이 해미가 중요한 성지로 자리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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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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