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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은 강당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병인박해 때 강당리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잡혀 10여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인근의 신자들까지 합치면 기록에 나온 이들만도 22명이나
3)
된다.
이 지역은 박해 이후 교우촌이 사라졌으나 다시 신자들이 모여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처형되던 해미 순교지가 멀지 않은 지역에도 공소들이 생기는 것과 더불어 서산지역이
점차 직접적인 박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서산 본당의 설립
서산 본당의 역사는 1908년에 수곡(결성 공리)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초대 주임
으로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 폴리(Polly) 신부가 수곡에 자리를 잡은 이후 1917년까지 이곳에 본당
이 있었다. 그러나 박해의 영향이 점차 사라지면서 신자들은 박해의 위험보다는 교통의 편리를
따져 본당의 위치를 잡고자 하였다. 그 결과 해로(
) 교통이 편하고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소길리로 본당이 옮겨지면서 서산지역 안에서도 한 본당 역사가 시작되었다.
소길리에는 1917년에서 1920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만 본당이 자리하였다. 당시에는 그곳에
신자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본당이 선 것이다. 1916~1917년에 작성된 통계에 의하면
소길리에는 288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런데 판공이나 대축일을 치를 때마다 다른 공소 신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거나 미사에 참석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길리는 지역 조건으로 인해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이 없어보였고 신자들마저 생계를 위해
자꾸 떠나가자 본당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네다섯 공소가 나서서
자신들의 지역으로 본당을 옮겨야 한다고 경합을 벌였다. 어떤 공소는 아예 성당으로 쓸 만한
기와집과 사제관을 짓고 운영비로 쓰도록 주변 산을 기증하면서까지 본당 유치경쟁을 벌였다.
결국 1920년 음암의 상홍리(가재)로 본당을 옮기게 되었다. 상홍리는 여러 모로 조건이 좋은 곳
이었다. 신자들도 많이 살고 있었고 서산과 멀리 않은데다가 교통도 용이하였다. 그곳 신자들은
4)
본당 유치를 위해 1919년부터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920년 4월 30일에 성당 축복식을 가졌다.
이후 15년 동안 상홍리 본당은 서산지역 천주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3) 최석우,
『서산 지방 교회사 소고』
『서산 동문 본당 70년사』
, 서산 동문 천주교회, 1987, 338쪽.
4) 상홍리 성당은 2007년 등록문화재 33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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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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