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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
1. 이순신 신도비
〔두전〕증좌의정 행통제사 시충무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증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봉덕흥부원군 시
충무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김육 지음
숭정대부 행의정부우참찬 오준 씀
가선대부 병조참판 이정영 전(篆)함
이백년 동안이나 나라가 태평하여 우리 백성들은 병란을 알지 못했다. 총을 쏘고
칼을 멘 왜적들이 동남쪽을 쳐들어와 서울과 개성과 평양을 모조리 함락시켜 일곱
도(道)가 도탄에 빠졌었다. 이때 도원수 권공(都元帥 權公)은 서울 근처에서 전투를
벌여 큰 성과를 얻었다. 통제 이공(統制 李公)은 바다에서 해전으로 큰 공을 세웠다.
이 두 분이 아니었다면 명나라는 무엇을 믿고 원군을 파병하여 전투에 힘썼을 것인
가. 종묘사직의 무궁한 국운인들 무엇에 의지하여 면연히 이어져 내려왔겠는가.
그런데 도원수 권공의 무덤에는 이미 큰 비석이 세워졌지만 통제 이공의 산소에는
아직 사적을 기록한 비문조차 없으니 이 어찌 여러 선비들이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
을 수 없는 일이랴.
이에 공(公)의 외손인 홍군(洪君)이 판서(判書) 이식(李植)이 지은 공의 시장(諡狀))
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이며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했다. 나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
까운 늙은 몸이라 붓과 벼루를 멀리해온지 오래 되어 공(公)의 기개와 공훈을 만분
의 하나라도 형용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공의 깨끗한 충성심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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